운동이 적극 추진되게 된다. 그러나 한편 1860년대 중반이후 국내의 대반란 세력이 점차 평정되고, 대외관계로 잠정적이나마 크게 호전됨에 따라, 이른바 미증유의 위기를 딛고 왕조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는 `중흥`의식이 등장하면서 외세와의 강경한 대결을 요구하는 언론들이 흥기하는 경향이 부각
민중적 제도를 결코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인민들 속에 이런 의식들이 남아 있는 한 더 이상의 계속적인 인민민주주의 혁명도, 인민경제 계획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한 북로당은 대대적인 사상개조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건국사상총동원 운동이었다.
마을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이 시절 만난 畢大殷이라는 사람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西北지역 출신이라는 지역적 특성, 청일전쟁이라는 복잡한 국제정세와 필대은을 만나면서 가지게 된 신사상에 대한 관심은 안창호가 서울로 올라오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서울로 올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19세기의 시민법 체계를 설명하던 이른바 관념 법학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근대시민법 질서는 근대 시민법의 근간을 이루는 개인주의적 원리와 그에 기초한 개념법학 적 구성에 대한 비판과 수정으로 자유법사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 ·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