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역사학의 등장 배경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5.11일 박정희 정부는 교육의 국적을 찾자는 제창에 따라 국사교육강화위원회를 두고 민족 중심의 역사교육을 실시한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안호상으로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단군과 고조선에 깊은 관심
역사학자들이 가장 잘 헐뜯을 수 있는 인물은 푸코일 것이다.
그는 우선 관념의 역사를 일종의 변화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제까지 이해되어 온 바와 같은 ‘관념의 역사’에 있어서 ‘사이비 연속성’은 단지 ‘표면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설사 관념들이 서
사이비역사학 저술의 대다수의 드러난 약점들은 20세기 초 직업 역사학자들이 지방사를 우연으로 가득 찬 족보, 찬탈한 영광, 근거 없는 단어들의 뒤범벅이라 경멸했던 사실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직업 역사가들이 지방사를 멸시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을 “일반”사로 간주하는가 하는 그들만의
역사학 연구 및 언론활동과 긴밀한 관련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중 최초 작품은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으로서, 이는 쟌 다르크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서 모두 10회의 回章體(회장체)로 되어있다. 이 소설은 쉴러의 『오를레앙의 소녀』의 번안작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중국을 통한 중역본이라
사이비 자유주의’ 등 그 폐해를 쉽게 드러내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어쨌든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미 국제적, 국내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고, 학술적으로도 이 용어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에 많이 친숙해졌다. 우리가 처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