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더 희박해져 붕괴하고 말았다. 봉건제도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공동의 모체에서 출발했는데도 프랑크 왕국의 해체 후 각국이 독자의 발전을 시작하자 지역에 따른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특색 있는 봉건체제를 나타냈다. 사회경제의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국가체제의 면에서는 달랐다.
왕국의 배타성과 할거성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두 가지 모순을 두드러지게 촉발시킨 원인이 사회적 생산력의 현저한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춘추전국시대의 변화양상은 경제적으로는 개체농민의 등장과 농업에 있어서의 소경영 형성의 출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분봉
봉건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정전제와 가부장제도 등의 체제가 확고히 잡히어 명실상부한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후대에 내려 가면서는 점점 약해지면서 주를 중심으로 한 3백여 개의 제후국들에 대한 주도권이 상실되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
봉건적 발생사가 갖는 중요성은 아마도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갖는 중요성에 못지않다. 자본주의 도래의 ‘누전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유럽에서의 봉건제의 발생은 두 가지 별개의 선행하는 생산양식들의 ‘파국적’이고 수렴적인 해체로부터 유래했다. 그 해체된 요소들의 재결합이 봉건적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