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왕이 되어서는 혼자 책을 보지 않고 신하들을 불러 다같이 보게 된다. 고전을 읽고 재상들과 함께 나누고 논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자리가 되는 ‘경연’은 세종의 학습 뿐 아니라 경영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로 꼽히며, 개방과 평등의 장 그 자체였다. 세종은 실제로 거의 모든 국가적 사무를
가치관 언어표현 방법도 달라 한민족 언어표현을 그대로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민족 나름대로 언어표현을 쉽게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여 조선백성들이 한글사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언어를 만든 것이 한글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은 널리 국민을 사랑하고, 특히 국민의
세종의 이상이 잘 녹아 있다.
세종은 무엇보다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면밀히 탐색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뒤 인재 부족으로 인한 국정 공백을 해결하기 위한 인재수급과, 백성들의 새 왕조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 민생고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다. 세종은 태종의 죽음을 앞두
세종 2년 집현전 설치운영으로 나타난다. 세종은 ‘현명한 자로 임금을 세운다’는‘택현론’의 원칙에 따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왕이 되기 전부터 국가의 흥망, 군신(君臣)의 사정(邪正)· 정교(政敎)· 풍속(風俗)· 외환(外患)· 윤도(倫道) 등 각 방면에 걸쳐 국가경영에 참고가 되는 서적을
세종실록』 26년 윤 7월 임인)
한 나라의 CEO로서 정신적 풍요 및 경제적 풍요를 동시에 갈구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겠다는 CEO의 이러한 ‘자기 선언’ 만큼 강한 메시지가 어디 있는가? 세종은 이상을 현실과 융합시키는데 있어 매우 탁월했고, 이 점이 그의 경영 성과가 드높아진 이유였다. 그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