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이 잘못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중국에서도 왕조가 바뀌면 음악 제도를 먼저 바꾸려고 노력했듯이, 한국의 세종 또한 이 같은 유가적 전통에서 볼 때 서둘러 음악정비와 개혁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세종 때만 해도 음악을 오늘과 같이 한낱
대왕대비의 섭정 하에서 왕실불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섭정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억불정책으로 돌아섰다. 연산군은 즉위초에는 할머니 한 대비의 영향으로 불경간행을 금지하지 않았으나 한 대비가 세상을 뜬 후에는 철저한 척불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중종때는 승과가 완전히
[ 세종대왕, 그리고 유교적 공론정치의 출발 ]
Ⅰ. Prologue
어떻게 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하는 길인지, 무엇이 옳은지, 그것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정책 결정자들이 내릴 수 있는 과연 무엇일까? 수업시간에도 다루었듯이 세종의 정치는 '협의‘ 정치였고 유교정치의 이상적 정치과정으로 인식
줄고 다시 세종대에 선(禪) ․ 교(敎) 양종으로 줄었다가. 마침내 중종 대에는 종단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승려의 신분도 하락하여 고려시대에 누렸던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박탈당한 체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다. 그 중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한 조치는 가장 상징적인 억불정책이었다.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는 당연히 음악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음악이란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와 풍습을 순화시키며, 정치를 고르게 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는데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