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음악 사랑 세종 음악 업적 소개 세종 음악 업적 배경 세종 음악 업적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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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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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 서 론 ] - 정간보를 통한 세종의 음악적 업적 소개 이유와 배경
Ⅱ. [ 본 론 ] - 세종의 음악적 업적 설명
1. 세종의 음악적 업적 개괄적 설명
① 음악 발전을 요구했던 시대적 배경
② 중국 음악의 ‘우리나라 화(化)’
③ 세종이 직접 참여하여 만든 음악들
2. 세종의 음악적 업적 세부적 설명
① 음악 이론의 재정립과 음악 체계의 정비 : 황종율관과 기본음
② 악기의 보완과 신곡의 제작 : 편종과 편경, 정대엽과 보태평
③ 음악 악보의 제작 : 정간보
Ⅲ. [ 결 론 ] - 한국 음악 문화의 CEO, 세종대왕
Ⅳ. [ 참고 및 각주]
본문내용

Ⅰ. [ 서 론 ] : 정간보를 통한 세종의 음악적 업적 소개 이유와 배경.
혹시 ‘정간보(井間譜)’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정간보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음악 수업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단어일 것이다. 정확한 의미의 정간보는 조선시대 때 세종이 창안한 악보로서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종전의 율자보(律字譜)·공척보(工尺譜) 등은 음의 시가(時價)를 나타내지 못하는 결점이 있어 이러한 결점을 없애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다. 정간보의 각 칸은 시가를 나타내고 12율명은 음의 높이를 나타내는데 이러한 악보를 서양음악의 5선보(五線譜)와 함께 ‘유량악보(有量樂譜)’라고 한다. 정간보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정간보에 대해서 설명을 했을까? 바로 정간보는 대표적인 세종의 음악적 업적이기 때문이다. 세종에 대해서 들어보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세종하면 ‘한글’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한글이 아니라면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등 여러 가지 대표적인 업적과 유산들을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들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세종의 음악적 일화와 업적을 얘기하고 싶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책과 독서 외에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고려 중엽부터 세조에 이르는 3백여 년 동안은 중국계 음악이 상당히 성행했던 시기였다. 이것은 온 국민이 중국계 음악을 즐겼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궁중에서만이 중국 음악에 편중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우리나라 전래의 ‘향악(鄕樂)’을 즐겼다. 이와 같이 중국 음악 일색이던 궁중 의식 음악을 정비, 개선하는 작업을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과감히 단행하였다. 즉 중국에서만 의존하였던 악기를 제작하고 세종 스스로 작곡도 하였으며 동양 최초로 음의 시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인 정간보를 창안하는 등 대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였다. 이렇게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이바지한 세종의 음악가적 재능을 볼 수 있는 일화들을 에서 찾아보자.
Ⅱ. [ 본 론 ] : 세종의 음악적 업적 설명.
1. 세종의 음악적 업적 개괄적 설명.
① 음악 발전을 요구했던 시대적 배경.
앞서 서론에서 말했듯이 모든 음 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만 알아서는 그 업적의 의의와 가치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세종의 음악적 업적을 설명하기 전에 세종이 음악 발전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지 그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흐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세종의 음악적 업적을 한층 바른 시각으로 이해함은 물론 그 같은 업적의 궁극적 본질과 의도도 비로써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유교에서 음악이란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와 풍습을 순화시키며, 정치를 고르게 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는데 있어서 더없이 좋은 수단이요 매체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왕조와는 달리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는 당연히 음악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자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의 실천은 곧 유교이념의 궁극적 실현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유교에서 음악은 중시되었으며 비중이 컸다. 조선초기의 세종대왕이 음악을 중시하고 훌륭한 음악정비 사업을 벌인 것도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조의 통치철학과도 맥이 닿는 것이다. 유교의 음악관(音樂觀)에서는 나쁜 음악이 유행하면 사회가 혼란해지고 급기야는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분위기를 건전하게 조성해갈 좋은 음악 즉 예악(禮樂)을 장려하고 망국지음(亡國之音)이라고 생각하는 음란하고 번잡한 음악을 배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또한 음란한 음악이 유행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유가적 음악관에 입각해볼 때 고려왕조가 망했다는 것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음악정책이 잘못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중국에서도 왕조가 바뀌면 음악 제도를 먼저 바꾸려고 노력했듯이, 한국의 세종 또한 이 같은 유가적 전통에서 볼 때 서둘러 음악정비와 개혁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세종 때만 해도 음악을 오늘과 같이 한낱 오락적인 기능이나 순수예술의 장르로만 생각하지 않고 풍속과 민심을 바꾸고 국가의 성쇠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에는 세종의 적극적인 음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고 중국 음악이다. 중국사람 이라면 평소에 들었으므로 익숙하여 제사 때 연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는 향악을 듣고 죽어서는 중국계 음악인 아악을 듣게 되니 어찌된 일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