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등용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을 등용,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꾀함.
-6조 직계제
의정부(議政府)를 견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확립.
-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을 꾀함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
세종은 자신의 왕위등극을 극렬히 반대했던 황희를 그 능력을 인정하고 여러 재상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임용하여 국정의 중요한 조언자로 삼았다. 지독한 책벌레였던 세종은 왕이 되어서는 혼자 책을 보지 않고 신하들을 불러 다같이 보게 된다. 고전을 읽고 재상들과 함께 나누고 논의하였던 것이
시대를 넘어 태평성대와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자신이 젊은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형님인 효령이 출가하면서 세종에게 남긴 “현세의 미륵이 되어라”는 당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은 그러한 시대적 안목과 대의가 있었기에 뜻있는 선비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의 선위를 이어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 또한 창조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과 스티브 잡스는 창조적 리더로서 혁신적인 방법을 통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으며 많은 팔로워들을 이끌었다. 이 두 인물들을 관점전환의 측면과 인재등용의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