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라의 봉양군(奉陽君)에 대한 '찬신(簒臣)'이라는 평가에서 그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무령왕 . 혜문왕 시대의 대외 관계와 순자가 찾아가는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국가 형편을 일별해 둘 필요가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국시대 말기에는 중원의 여러 나라
순자는 그들의 사상을 널리 공부하였고 그러는 동안에 다른 학파의 현실적인 사상들이 반대로 순자에게 영향을 미쳐 정통적인 유학과는 다른 독특한 사상 체계를 이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유가에서 크게 평가되어야 할 순자의 공로는 여러 유가 경전에 대한 폭넓은 연구이다. 순자는 서로 해치고
순자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다만 겨우 이 무령왕을 사구궁에서 아사하도록 한 조나라의 봉양군에 대한 '찬신'이라는 평가에서 그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무령왕 . 혜문왕 시대의 대외 관계와 순자가 찾아가는 제나라와 진(秦)나
순자는 〈시〉〈예〉〈춘추〉를 잘하였다고 일컬어져 직하에서 주목되었고, 제나라 왕에게 중용되어 세 번이나 학교의 좨주(祭酒)가 되었다. 그는 약 10여 년간 제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사이 진(秦)나라에 가 소왕(昭王)(기원전 306∼기원전 251)에게 유교의 효용을 권하고, 조(趙)나라에 가서는 효성
나라 이후에는 선제의 이름인 순을 피하여 성을 고쳐 손경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 순자는 어린 시절부터 재주가 뛰어나 또래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제나라 직하의 학궁에서 오랫동안 제자백가를 배웠다고 하는데 아마도 학궁이라는 곳은 나라에서 설립한 국립대학이나 연구소 쯤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