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신립장군전설(신립장군설화)의 개념과 역사적 기능
역사가 기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민중이 인식한 민중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전통사회에서 기록의 수단을 갖지 못한 민중은 일회성의 구비문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립설화는 신립의 패사 사건에
Ⅰ. 신립장군설화(신립장군전설)의 역사적 배경과 의혹
신립은 1546년에 태어나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한 다음 선전관, 도총부도사, 경력, 진주판관을 거쳐 온성부사가 되었다. 온성부사로 있던 1583년(선조 16)에 북변을 침입한 尼湯介를 죽이고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는 공을 세워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신립장군설화(신립설화) 속에서 신립의 모습은 결코 영웅의 모습은 아니다. 대장의 상을 가지고 있으나 특별히 영웅적 모습은 아니다. 다른 임진왜란 설화에서 나타나는 김덕룡, 임경업,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설화에서 나타나는 이인적 모습이나 영웅적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왜 민중이 ‘
처음부터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자신을 엄격히 규제하고, 자신의 이성에 의해 상(象)을 만들어 온 신립이 역시 타인에 의해서 그러한 상이 비판의 대상이 되자,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더불어 세상살이에 대한 자신감 역시 어느 정도 위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권율로 상징되는 타인의
Ⅰ. 서론
탄금대 전투 패배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뼈아픈 어처구니없는 패배였다. 신립이 김여물 장군의 조언을 받아들여 조령에서 매복해 있다가 기습공격을 택했다면 적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상식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조령(鳥嶺)이라는 천혜의 지형적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