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신립장군전설(신립장군설화)의개념과 역사적 기능역사가 기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민중이 인식한 민중의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전통사회에서 기록의 수단을 갖지 못한 민중은 일회성의 구비문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립설화는 신립의 패사 사건에
들어가기 전에
한참을 고생해서 거의 완성시켜 놓았던 파일이 날아갔을 때의 그 절망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추측할 수 없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어딘가의 저장 공간에 담아놓고 작업을 이어나가지 못한 내 책임과, 컴퓨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가 가장 크겠지만, 막상 일을 당하
의 조선후기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1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선 것은 동아시아 세 나라가 함께 겪은 변화였다. 일본의 덕천막부와 중국의 청나라와 달리 중세후기의 이상을 버리지 못한 조선왕조는 사회통제 능력을 상실하고 모
의 생명은 물론 국가전체 존립에 위험을 초래했던 한사람의 뼈아픈 실수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음으로써 전설이 결합될 숙주(宿主)적인 분위기가 조성된다.
Ⅱ. 신립장군전설(신립장군설화)의 형성원인
임진왜란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친 두 인물이 있으니 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신립은 충주로 내려와 탄금대에 진을 치고 싸우다가 전군이 함몰되자 자신도 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선조실록에는 이 전투의 전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립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 제장들은 모두 조령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고자 하였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