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유달리 자신을 드러내는데 인색했던 강희안이 유독 [양화소록]을 이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작은 풀까지도 자세히 관찰하면 따스한 정과 깊은 생각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라는 그의 보편적 휴머니
양화소록(養花小錄) 등이 있었다.
이와같은 조선전기의 농학은 중국농서를 도입하는 데서 출발하여 이를 번역하여 보급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우리 농서의 편찬과 간행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우리 농학 발달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농서의 편찬은 관찬과 사찬이란 두 보완적인
Ⅰ. 벼농사의 기원
한국에 있어 농업사 연구는 최근 들어 적지 않게 진전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서의 “이앙법의 보급”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하게 한 중요한 성과였다. 특히 농업이 전근대사회에 있어 문화와 산업의 중핵이란 점 때문에 농업사 연구는 농업기술의 발달이란 범
"양화소록(養花小錄)"은 조선 세종 때의 명신 인제(仁齊) 강희안 선생님의 저서입니다. 원명은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고, 강희안 선생님은 일생동안 식물을 직접기르시면서 “아 아 ! 화초는 한낱 식물로써 감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양하는 묘법을 알지 못하고 거두어 간직
저는 양화소록을 읽고 지금의 식물도감이랑 비교했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지금의 도감은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거나 사진이 들어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양화소록은 글만 읽고도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묘사가 너무 잘된 것 같습니다. “몸뚱이는 두서너 아름이나 되지만 높이는 45척이 못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