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를 ‘적그리스도’라고 몰아세우고 파문을 내리는 경고장을 보냈다. 이에 루터는 군중이 모인 앞에서 교황의 경고문을 불태워 버렸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공인되자, 가톨릭이 아닌 루터교는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해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돌풍을 불게 했다.
찰스 5세가 그녀를 위해 결혼 무효승인을 취소케 했다. 이 일을 담당했던 왕의 비서장 추기경 월시는 실각되고 그의 비서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과 캠브리지 교수인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헨리 8세를 돕게 된다. 결국 헨리와 앤 볼린의 혼인이 합당하다는 결정으로 앤은 여왕에 오른다(1533).
영국의 종교 문제는 잠시 답보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한 후에 루터주의의 성격을 띈 서머셋 공작이 권력을 잡았다가, 칼뱅주의자인 워윅 백작에게 밀려나면서 성공회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 교도인 메리여왕이 정권을 잡으면서 잠시 가톨릭이 득세하는 듯 했
통해 사회개혁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
- 고우설 부인이 제시한 여성 평신도로 구성된 방문회 조직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라스 부 인으로 하여금 ‘자선 부인회’를 조직하게 하고 수녀간호사를 도왔다.
- 자선 간호단은 좀 더 자선적이고 순수한 간호 사업을 위해 여자를 모집하였고, 자선부인
개혁하고 성직자 양성을 줄이는 시도를 했다. 이 일을 하면서도 그는 전통 신앙에 충실히 남아 있었다.
이처럼 헨리 8세가 “신앙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무렵, 루터주의는 영국 대학들에서 최초의 지지자들을 맞이했다. 특히 캠브리지에서는 서클 하나가 “백마”라는 여관에 모여 비텐베르크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