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을 제약하였다. 대간(臺諫)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잘못을 목숨을 걸고 간쟁(諫諍)하였고, 경연(經筵)‧서연(書筵)제도를 통하여 국왕이나 왕세자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였으며, 사관(史官)제도를 통하여 국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였다. 인사권과 군사권이 형식적으
하고 있었다 함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자 통치론의 구도는 군주가 그 일심을 함양하여 대공지정하게 됨으로써 왕권의 사사로운 운용을 일체 지양하는 한편 현인을 가려 대신의 직위에 앉히고 그로 하여금 백관을 통솔하여 국가를 다스리도록 한다는 소위 재상 위임통치론으로 되어 있었다.
I. 훈구세력과 사림
1. 서론
16세기 사림정치가 시작되며 붕당정치가 판을 이루기 전에는 공신들과 왕족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훈구세력이 득세를 하였다. 훈구세력의 특징은, 초기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지으며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중앙집권적 성격이지만 갈수록 권세가 심해져 점
. 서론
일제 식민사학에 의하면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도평의사사와 몇몇 재신에게 정권이 돌아가고 왕권은 허약한 약체국가로 평가된다. 태조의 왕권이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재가하는 것에 그치는 허약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말 무장으로서, 군정의 실권자로서 위명을 떨치며 도
Ⅰ. 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의 전제왕권
이기백은 신라 전제정치의 성립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해온 바가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국사강좌』1 (고대편)가운데 담당한 제 5장 <통일신라와 발해의 사회>의 `전제왕권의 확립`이란 소절에서 정리 제시되었다. 여기서 이기백은 태종무열왕이 상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