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해, 그녀의 이미지를 간교하고 간사하게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의 우리 연구는 이른바 대원군․훈련대 주모설 부정, 또는 주한공사 미우라 주모의 입증하는 형태로의 성과만을 가져왔다. 이는 문제의 핵심인 일본정부의 시해관련 부분을 언제나 구명되지 못하는
일본의 앞선 과학기술을 습득하여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사상에 입각하여 외국과의 통상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는 고종이 이미 20대의 성인이 되었고, 서원철폐에 대한 최익현등 지방유림의 반발과 황후 및 개화파의 통상론에 밀려 대원군이 실각한 것에 따른 것으로 국정의 방향
을미사변,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됐는지 우리는 과연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1895년(을미년)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우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의 강화를 획책하였던 사건’ 이라는 것이 전부 일 것이다. TV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에 의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 로, 기존 집권층의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구군인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