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 뒤에 진을 폐지하였다.
2.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
① 세종: 세종 초에는 삼포에 거주하는 항거왜인의 수를 60명으로 한정 하였다. 그러나 항거왜인의 수는 1466-1494년의 약 30년 동안 2천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생활 안정을 위해 건너오는 일본
왜란
고려 말부터 우리나라 해안을 침범해 오던 왜구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성격이 사납고 거칠어서 다루기가 힘들었다. 세종 원년에는 장군 이종무를 보내어 그들의 본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고, 화를 없애기 위하여 부산포. 염포. 제포의 3항구를 열어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게
성리학은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세력을 성리학자로 바꾸었으며, 고려시대의 지배이념인 불교의 지위를 크게 하락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간쟁을 담당하는 낭사가 독립적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역시 임금이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인과 같이 정치를
왜란과 호란이 미친 영향에 대해 교재를 참고로 하여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한중일 상호인식의 흐름이 왜란에 미친 영향
1) 조선-명의 상호인식
필자의 생각에 조선-명나라의 상호인식이 왜란에 미친 영향은 크게 2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교재에 따르면 명의 엽향고는 “수당 시
경외심과 존경심이 녹아 있으며 일신의 번영을 위해 영웅들을 모함했던 인물에 대한 증오심도 서려 있다. 또한 반드시 일본을 정벌하여 왜란의 치욕을 씻었으면 하는 염원도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염원과는 달리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면서 《임진록》은 금서로 지정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