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공민왕 이후 우왕 때까지 횡포가 더욱 심하여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
- 3포왜란
고려 말부터 우리나라 해안을 침범해 오던 왜구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성격이 사납고 거칠어서 다루기가 힘들었다. 세종 원년에는 장군 이종무를 보내어 그들의 본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
왜관은 왜인들의 행동의 제한, 국가기밀의 누설방지, 국방상의 이유로 접대처와 교역처를 한정시키기 위하여 비용을 부담하면서 특별히 설치한 것이다.
1544년 다른 곳의 왜관은 모두 폐쇄하고 부산포에만 단일 왜관제도를 설치한 후, 임진왜란 때 일시 폐쇄되었다가 임란 후 몇 차례 장소를 옮긴 후 1
왜구와 공무역의 형태를 띤 면포가 크게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는 것이 특히 문제였다. 1494년에는 일본 국왕사절이 가지고 온 사진물(私進物)이 면포 28,829필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었다. 이러한 재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진을 금지하는 억제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항거 왜인의 수가
. 들어가는 말
태조는 즉위 직후 무로마치 막부에 승각추를 보내 왜구의 금압, 붙잡혀간 조선인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동시에 수호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족리의만은 사신을 보내 붙잡혀간 조선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측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족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