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여진을 교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중일 삼국은 과거부터 질긴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본론에서는 조선시대한중일의 상호인식의 흐름과 그것에 왜란과 호란이미친영향에 대해 교재를 참고로 하여 기술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한중일상호인식의 흐름이 왜란에 미친영향
1) 조선-
조선인의 손으로 人類의 韻律界에 提出한 一詩形」이라 하여 시조가 민족문학의 근본이며 고유한 시 형식임을 밝힘과 동시에 「시조가 시의 형식으로서 인류정상의 운율적 표현의 방법」이라고 정의하여 시조가 본질적으로 운율에 의하여 창작되는 문학이라고 하였는데 이는「詩는 美의 韻律的 創造
일본측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일본뿐 아니라 명나라도 강화를 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벽제관전투에서의 패배가 명나라 조정에 큰 영향을 끼친 탓이다. 조선은 명나라의 강화책에 크게 반발하였으나 강화는 조선의 의향을 무시하고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서만 진행되었다.
3) 진주
일본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해 줄 수 있었다.
통신사는 비록 일본의 막부의 경제력 악화와 조선의 재정적 문제로 교류의 역사가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교류 기간 동안 조선통신사는 막부 조정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문화적 자극을 주었으며, 이것이 양 민족 간의 상호 이해를 돕고 나아가 상호 멸
, 향후 다툼의 여지를 만들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은 과도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히 통일한국의 출현은 한반도의 민족주의가 고양될 것이고, 이것은 중국 국경 내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영토문제를 제기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