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독립운동과 8.15해방 이후 신국가건설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적 이념은 다양하였지만, 학계에서는 크게 보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독립운동도 민족해방운동의 형태를 보였기에 ‘민족주의 vs 사회주의’가 아닌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구도로 설
조선에서는 이해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사회주의와의 접촉경험과 지적 전통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볼셰비즘이 거의 절대적으로 도입되었다.
둘째, 3·1운동과 외교독립운동의 실패와 반성을 통해 민중 스스로가 주도하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을 조직적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다수의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으므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더욱 직접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혁명정부가 일련의 선언 등을 통해 독립과 평화와 평등을 천명했으며, 실제로 민족해방운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의해 사회주의 이념
조선공산당과 대립하며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서울파의 해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이르쿠츠크파 중심의 오르그뷰로와 연계된 화요파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13인회의의 활동에까지 이어진다. 13인회의는 서울파․상해파․북풍파의 주도 아래 운
,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
상해임시정부는 러시아 노동정부에게 독립군 양성을 위한 협조를, 러시아 노동정부는 상해임시정부에게 공산주의를 동양에 선전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소련과의 관계는 한인사회당 이후 후신인 ‘고려공산당’에 의해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