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일대 시적(詩的) 전환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지사(志士)인 학자이며 논객(論客)으로, 문화·예술·사상·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였다. 81년 고향인 영양군 일월면(日月面) 주곡동(注谷洞)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저서로 시집 『청록집(靑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 강사에 취임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큰사전」편찬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심문을 받게 된다. 1945년 조선문화 건설협의회 회원이 되고 한글학회 「국어교본」편찬원이 된다. 그리고 명륜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한다. 그 이후 1946년 경기여고 교사로 지내면
7월 문예동인지 《백지(白紙)》의 편집에 참여 <계산표>,<귀곡지>,<우림령> 등을 발표.
12월 《문장》지 11호에 <승무(僧舞)>로 2회 추천 받음.
1940년 《문장》지 13호에 <봉황수>,<향문>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김위남 여사와 결혼.
1941년 3월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 강사취임
월정사에 입산하면서 불전강사생활을 했다. 이 즈음 대덕 방한암 스님의 도상(道相)을 입고 수행하며 지낸 선방 참선하는 방
생활은 그의 시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22세 때인 1942년 3월에는 조선 어학회의 「큰사전」편찬원으로 일하면서 학문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해 10월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월정사 강원의 외전강사로 입산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으로는 「산」, 「고시」, 「산방」, 「완화삼」, 「낙화」,「파초우」등이 있다. 이후 다시 상경하여 조선어학회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지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심문을 받고 낙향하지만 또 다시 상경하여 조선문화건설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