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에는 이미 상이한 두 체제가 그 기초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해결방안, 즉 단일의 독립된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으로 미소가 합의한 것이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협정이었다. 그 내용은 ‘선 임시정부 수립, 후 신탁통치’를 거쳐 한국을 단일의 국민
문제를 유엔 소총에 이관되고 48년 2월 메논을 위원장으로 하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 실시를 보고함에 따라 한반도의 분단은 눈앞에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 분단을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은 북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연석회의
◎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이후 결과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음
미소 양국 간 불화가 고조 됨
미국의 지지세력인 우익진영의 격렬한 반대로 탁지안의 포기를 불가피하게 됨
소련은 북에서 반탁운동을 억압, 좌익 세력으로 찬탁운동 전개를 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의 이행을 촉구하는
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0년 10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을 광둥[廣東]의 쑨원[孫文]이 세운 호법정부(護法政府)에 파견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폴란드․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하였
회의를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비상국민회의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위원회도 참여한다.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도진순, 64쪽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의 계략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정무위원 28인 모두가 민주의원이 되면서 비상국민회의는 미군정의 자문위원단의 성격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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