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에 외세의존적인 분단정부가 수립되려함에 이에 대항하여 한국민족주의의 이상을 지키고자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전개된 남북협상운동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해방 직후 한국민족주의 운동의 마지막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협상운동과 그 이유가 된 단정노선에 관해 알아보고 그
한국 근대사(근현대사)의 역사
오랫동안 권위주의 체제에 익숙해 있던 일반 대중들을 어떻게 하면 새로운 민주체제의 지지세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민주적 이행과정을 거친 나라들이 공고화 과정에서 당면하는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다. 더구나 한국처럼 구시대의 엘리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7년 국무회의의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안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948년 1월에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를 위해 남북협상을 위해 북한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 한다”라는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며 이후 얄타회담에서 다시 확인되게 된다. 이것은 민족해방운동에 의한 독립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족의 주체적 역량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점
의의를 가지는데, 그것은 한국민족이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조직적 활동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 성격이 자생적이고, 자주적이었다는 점이다. 건준은 일반국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좌우 연합의 통일전선 세력으로 출발하였으나 각 세력의 정치적 위상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한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