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기원 793년 21살 되던 해에 유종원은 진사에 급제했습니다. 5년 후 그는 궁정에서 도서를 편찬하고 대조, 검열하는 일을 맡아하게 되였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그는 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경성에서 관리로 있는 5~6년간 유종원은 많은 작품을 썼는데 깊은 함의와 힘 있는
유종원은 유주에서 4년간 근무하다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유주 사람들은 유종원 생전의 업적을 기려 사당을 지어 기념했다.
그의 작품으로는,《봉건론(封建論)》,《영주팔기(永州八記)》,《비국어(非國語)》,《시득서산
연유기(始得山西宴遊記)》등이 있고, 《유하동집(柳河東集)》,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묘지명(墓地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귐을 증오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사람이란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2. 시대배경 당대에 고문운동이 일어난 것은 문학발전상 필연적인 추세였으며, 한편 당시의 사회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건안부터 초당까지 몇 백 년 동안 중국문학은 유미주의로 흘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