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 결정, 히라누마(平沼)로 창씨개명 신청하기 1개월 전 고국에 서의 마지막 작품 <참회록>을 씀
- 1943년(27세) 7월 14일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
- 1944년(28세) 윤동주, 송몽규 징역 2년 언도,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윤동주와 송몽규,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제5
윤동주 시의 특징
윤동주는 그의 시에서 시작(詩作)날짜를 기록해 두고 있다. 그럼 윤동주는 왜 시작날짜를 밝혀 놓았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시가 내면세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윤동주는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따라서 그의 시는 자기성찰적 경향이 강하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윤동주는 출판을 단념하게 된다. 정병욱이 받게 된 시고집 1부는 정병욱이 학병으로 글려가기 전에 자신의 집에 소중히 보관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정병욱 보관본에 의한 것이다
1941년 말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과정을
윤동주가 처음 문학을 접한 것은 명동 소학교 4학년 무렵이다. 이 때 서울에서 간행되던 아동 잡지 《어린이》,《아이 생활》을 구독하여 읽고 그의 고종 사촌 송몽규와 함께 『새명동』이란 이름의 등사판 분배지를 발간함으로써 동요, 동시를 습작하게 된다. 윤동주가 동시를 집중적으로 쓴 것은 평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받는다. 윤동주는 본명이며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海煥)이다. 후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동주(童舟)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25년 9세 되던 해에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에는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벽보 비슷한 ‘세명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