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제치고 이러한 주제를 선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홍콩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이다. 홍콩은 주장강 하구의 동쪽 연안에 있는 홍콩섬과 주룽반도 및 그 밖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찍부터 중국인들이 정주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적도 많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1842년 영국과 청(淸)
중국의 전통적 사회가 혼재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은 홍콩반환협정을 체결하여 1997년 7월 1일을 기하여 155년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고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됨으로써 그 절정을 맞는다. 홍콩은 155년간 영국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영국적 시스템의 문화를 꽃피웠고, 중
중국영화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각 나라의 상업용 영화가 수입되어 배급되었기 때문에 중국영화는 제대로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중국인은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식민 지배자들의 침략에 어떤 대비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면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중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독자적
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유학생으로서 ‘탕차오’란 단어가 표면적으로든 의미상으로든 모두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의 문화예술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하지 않은가? 네 사람은 시원스럽게 밴드의 이름을 ‘탕차오’로 결정했다. 뒤이어 그들은 그룹명에 걸맞는 음악의 풍격을 조율하고 그룹의 캐
영국 등 신흥 세력에 의해 크게 실추되었을 때였다. 1860년에 스페인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필리핀에서도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이 나타났다)
- 1892년에는 ‘필리핀민족동맹(La Liga Filipina)’이 조직되어 사회개혁을 시도했으며, 비밀결사조직 ‘카티푸난(Katipunan)’의 무장봉기도 일어났다. 나아가 1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