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지이다, 이런 읍지들 가운데 사찬의 읍지들이 있어 주목된다. 조선시기는 그런 점에서 볼 때 지방사 서술이 매우 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 읍지는 지금 지방사 연구를 하는데도 아주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지방사 연구를 할 때 문서나 기록에 대한 취급기술도 중요하지만, 그보
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 군병조의 사옹원 장인보 30명이나 19세기에 간행된 <이천부읍지>의 사옹원 자기장인보 30명 징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두 번째로 16세기 후반부터 조선말까지 왕실에 식기류 및 제기를 납품하였던 경기도 광주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자오수도) 하였다.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및 邑誌(읍지)에 실려 있으며. 咸平(함평)에 遠慕祠(원모사)를 세워 祭享(제향) 하고 있다.
항렬자(行列字)
항렬자는 34代孫은 鐘(쇠북 종), 錫(주석 석)을 이름 가운데 자에 쓰고 있는데, 제 이름은 부모님께서 직접 지어주셔서 항렬자와 관계가 없습니다.
읍지에 戶口가 5개면에 8,011호이고, 인구가 27,791로 나타가고 있다. 남자가 13,465인이고 여자가 14,326 인이다.(국사편찬위원회.1973)
‘女多’의 섬으로 상징성을 지니게 된 데는 세종실록 지리지, 김상헌의 남사록등에 여자가 많고 바다 일을 많이 한다는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석주명(1949)이 제주도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