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매우 중요시하게 여겨져 온 연구대상이었다. 광복 이후 당시 시대를 주도하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 진영에 의하여 분열된 한국사의 특수성은 각각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도구로서 독립운동사를 활용해야 했다. 여기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의 주역이었던 이승만은 이른바 임시정
독립운동사나 일제침략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과제가 많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관련자료의 수집과 전문연구자 양성, 기본자료집 보급 등이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그럼 친일파의 정의와 그 형성배경 및 활동을 알아본 후 해방 이후 반민법과 반
정부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면서, 상해와 노령의 정부를 개조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이 통합 임시정부에는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하였던 노령의 이동휘 세력이 가담하였고, 서.북간도의 무장 독립군도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성이 강화되었고, 군사적 기반도 일정하
독립을 이미 선언하였으므로 일본의 통치권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독립을 확인 또는 완성하기 위한 자치단체를 조직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1919년 5월 국무총리 이승만 명의로 발표된 「통유」 제1호에서도 반복되었다. 즉, 납세 거부.송사 거부.군단위 자치단체 결성 및 자치제 시행 등을 촉
독립운동총체를 살펴볼 수 있으며, 해방이후 정국의 모습에 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조선건국동맹의 여운형,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중심의 이승만과 유격대 활동의 김일성과 통일전선운동의 김두봉의 다섯 명의 좌우 정치 지도자들을 살펴보고 좌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