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새로운 사원을 창건하고 각 지방의 선사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호족들의 포섭과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호족인 중앙귀족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에 대해 알아보고 내가 만일 고려 인종이었다면 이자겸의 난 그리고 묘청서경천도운동난을 어떻게 대처했을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그 반란」, 『고려시대의 연구』, 아세아문화사, 1980.
이나 일부 학자들은 묘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또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며 재야사학이나 학계의 다른 일부 학자들은 신채호의 사상을 옹호하고, 묘청의 난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상반되는 두 입장을 정리해보
서경인들은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는 데 적극적이었다.
3) 인종의 서경 행차
서경에 머물던 인종은 척준경을 축출한 직후인 3월에 국정쇄신(國政刷新)의 지침을 담은 칙령을 반포했다. 자신이 즉위한 이래 재변(災變)이 이어져 안녕(安寧)한 해가 없었는데 작년 2월에 역적이 난을 일으켜 부득이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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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목표
1. 문벌 귀족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2. 이자겸의 난과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결과를 이해할 수 있다.
3. 무신정권의 성립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추천문헌 및 사이트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청년사,
이자겸은 왕권을 거의 능가할 정도의 절대적 권력을 잡았는데, ‘이자겸-척준경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 버리고 왕실의 위엄은 크게 실추되었으며, 기득권을 누리는 문벌과 그렇지 못한 신진관료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중앙의 통제력이 이완되면서 지방관들의 중간수탈로 인해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