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이 일으켰던 난을 가리키는 용어는 크게 두 개가 있다. 묘청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그것인데, 이는 묘청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두 개로 나눠진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묘청의 난에 대한 연구결과들도 마찬가지로 한 인물로서 묘청에 대한 평가나 사건 자체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게
왕건이 새로운 사원을 창건하고 각 지방의 선사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호족들의 포섭과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호족인 중앙귀족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에 대해 알아보고 내가 만일 고려 인종이었다면 이자겸의 난 그리고 묘청서경천도운동난을 어떻게 대처했을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서경천도운동’. 자칫 반역에 대한 진압 정도의 평가로 묻힐 수도 있었던 870여년 전의 이 사건은 단재 신채호가 ‘조선 역사상 1천년내 제1대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주목받았고, 지금은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사건의 승자와 패자로 구분되는 김부식과 묘청
2) 서경의 위상
서경은 늘 개경 다음 가는 위상을 지닌 도시였다. 남경이 건설되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태조 이래로 서경은 늘 개경을 대체하는 천도의 후보지로 각광받았다. 태조가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수덕(물의 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으로 만대에 이루도록 대업을
서경(西京)천도 추진 등은 왕권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뒤를 이은 광종은 강력한 왕권확립을 위해 과거제도의 채용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 공복(公服) 제정.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훈신 숙청을 통하여 과감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했다. 경종대에는 광종의 왕권강화정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