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아래에 소년으로 보이는 인물이 고개를 쳐들고 왼쪽에 있는 달을 바라보면서 한 손을 머리 위로 쳐들었는데 마치 전통적인 춤사위 동작처럼 보인다. 소년의 머리는 중앙의 좀 아래쪽에 자리 잡았고 오른쪽에는 머리를 내미는 듯한 소가 그려져 있다. 화면의 중앙을 채웠던 이중섭의 이전 그림과
된다.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무작정 갔기 때문에 생활고에 부딪쳤다. 이중섭은 하는 수 없이 막노동을 하게 되었지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였다. 그런 도중 장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왔고, 아내는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이들과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가족과도 같은 모습은 그가 바라는 꿈이었다. 이런 까마귀들처럼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던 것 같다.
(좌측부터) 달과 까마귀 1954, 황소 1954, 흰소 1954
대표작인 소들에 대한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에 이중섭은 경남 통영에서 작품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
민족은 한국적이요, 한국하고도 북방적 요소에 가득찬 한국이었다. 중섭의 예술이 한국적이라는 것은 그이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유동하는 선조(線條)감각에서 엿볼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는 고구려의 벽화의 선조감(線條感)에 직결하는 그이 표현의 특성은 가장 민족적인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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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작품에 관한 과제를 작성하기 위해 전시관을 방문한 곳은 국립현대 미술관이다. 평생 가난한 화가로서 인생을 살면서 그림에 대한 정열은 어느 누구 못지 않았다. 심지어 그림그릴 종이가 없이 담배값 속에 있는 은박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뛰어난 예술가의 비병악화로 인하여 병원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