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조선에 미친 영향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러일 간의 급박한 사태를 감안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군대를 서울에 투입하고
.....후략.....
충실하게 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 이에 반대했다. 1877년 불만 사족세력이 사이고오를 부추겨서 가고시마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서남 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에 의해 잘 훈련된 신식군대는 이 반란을 반년 만에 진압해 버렸다. 이에 이러한 무력 반발도 종식되었다.
기습남침을 자행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즉각 한국전 참전을 결의함에 따라 유엔 16개국의 일원으로 남침 5일 후인 7월 1일 미 제24사단 소속 1개 대대(일명 스미스 부대)를 시발로, 휴전 직전인 1953년에는 최대 32만5000여명의 병력이 참전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주한미군은 육군 7개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또 만주지역에서 양성된 독립군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3․1운동은 이후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한 것이 가장 큰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추진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을 미국의 대소 동북아 전진기지로 만드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에 미국의 정책에 따라 일본에 대한 전범 처리 문제, 전후 배상 문제는 최대한 가볍게 전개되었고, 이후한국의 전쟁 처리 문제에 논쟁을 불러온 원인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