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2년 11월 13일 개최된 화북조선독립동맹 晉西北 분맹 결성식장에도 김구의 사진이 손중산.장개석.모택동.카타야마 센(片山潛)의 사진과 함께 걸렸다. 이는 독립동맹이 임정 주석 김구를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임정을 민족통일전선 결성의 주요 동맹자로 설정했음을 반증한다.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한국민족은 이미 1905년 전후부터 일본 제국주의를 한반도에서 추방하기 위해 의병들이 선전을 포고하고 한일무장투쟁을 벌였다. 특히 3.1운동 직후부터의 큰 규모의 독립군의 전투활동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의 활동은 이미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전
임시정부의 ‘행정부’인 국무위원회의 권한이 축소된 반면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해 임정의 유지를 위한 자구책의 성격을 띠었다.
임시정부 지도체제의 개편이 주요한 목적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약헌은 민족운동전선에서 제기된 민족유일당운동을 수용하여 독립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
임시정부의 중요성
3․1운동과 그 이념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독립군항전 등의 평면적인 사실규명에는 관계자료의 발굴수집과 병행하여 어느 정도의 진전을 보았으나, 그에 대한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해석에는 아직도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3․1운동을 계
임시정부가 기대했던 파리강화회의에는 한국 문제가 상정조차 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제사회에 대한 외교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과 국제사회의 평화주의적 도덕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통합임시정부의 출범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 상의 변화가 나타났다.
통합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