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여수(麗水)로 돌아갔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이끌던 조선수군은 鹿島萬戶 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5) 명량해
활약이 거세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형편이었으나 해전에서는 일본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무기에서나 수적으로나 전력 면에서 조선수군이 왜구에 비해 절대적인 약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23전 23승을
Ⅰ 서론
임진왜란은 글자 그대로 임진년에 왜가 난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런데 ‘왜’라는 비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속에는 주관적인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객관적으로 상대방을 파악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경멸한다. 여기에는 국가와 국가 간의 대등한 전쟁이란 시각은 존재
(3) 최경회 장군과 2차 진주성 전투
- 2차 진주성 전투 직전 조선군의 상황
: 진주성 방어전략에 의한 의견충돌로 인해 성을 비우고 병력을 보존하자는 공성파와 왜군의 호남지역 진출을 막기 위해 진주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수성파로 갈림.
●공성파 : 의병장 곽재우와 임태영, 순변사 이빈
조선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게 된다.
이순신은 또한 사천포해전(泗川浦海戰)에서부터 거북선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1592년 7월 7일에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다.
임진왜란 전개 과정
이 전투에서 원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