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전선 100여 척을 격파한 뒤, 왜군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여수(麗水)로 돌아갔다. 조선군이 육지에 올라간 왜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육전이 해전에 비해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이끌던 조선수군은 鹿島萬戶 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5) 명량해
I. 서론 : 임진왜란(1592년) 이전의 동아시아의 정세와 발발 요인
조선시대의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생각해 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말한다. 임진왜란이란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 2차례에 걸쳐서 1592(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임진년에
수군은 육상에서의 연전연패와는 다르게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 활동한 거북선은 단 세 척에 불과했다. 조선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의 명성에 가려져 있는 판옥선을 재조명 하고 과연 어떤 배였기에 조선수군이 왜의 수군에
이순신의 전술은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판단을 중요시하여 조정의 무분별한 전술을 일정 무시하기도 했다.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육상지역에서는 왜군이 지속적으로 북으로 전진하여 끝내 한양이 무너지고 임금은 북으로 도피를 하여야만 갔다. 이에 명나라 천군이 등장하여 조선지역 전체에서는
해전에서는 일본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무기에서나 수적으로나 전력 면에서 조선수군이 왜구에 비해 절대적인 약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23전 23승을 거둔, 임진왜란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9월 16일. 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