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重臣) 오원(伍員)의 추천으로 오왕 합려(闔閭)에게 13편의 병법을 선사하여 장군직을 맡게 되었고, 오 나라와 초(楚) 나라 사이의 장기적인 권력 쟁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가 지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은 고대 중국의 전쟁 체험을 집대성한 책으로 뒷날 모든 병서의 모범이 되었다.
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로부터 많은 무신들이 이를 지침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역관초시의 교재로 삼기도 하였다.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명구도 담고 있으며, 《손자병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인용 번역되고 있다. 제나라의 손무는 손자병법을 썼다.
위해 두갈래 길 중 매복한 길에다가 연기를 피우게 해 조조를 꾀었는데 이 때 조조는 제갈 량이 자기를 유인하기 위해 일부로 복병이 없는 곳에 연기를 피웠을 것이라고 생각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 병서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친하면 떨어지게 하는
승리한 이여송은 조명연합군은 퇴각한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 평양의 탈환이 목표였던 명군에게 일본군 추격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류성룡이 하루 빨리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여송이 파주에 닿은 것은 26일이었다. 27일, 일본군을 우습게 본 명군은 벽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