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 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뭔가 끌어당기는 것을 태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당시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시 대하면서 그의 죽음에 우리 모두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의문점이었고 나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만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태일 = 노동운동가 = 분신자살 이라는 지극히 피상적인 사실만을 어렴풋이 알고있던 나에게 이번 노동법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노동자들은 70년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민주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후반기에는 이러한 민주노조들이 성장하면서 박 정권의 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로 우리나라 노동현실
전태일이 1968년에 만든 노동운동단체로, 이듬해에 전태일이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 창립총회’를 주최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바보회라는 이름에는 노동자들이 바보처럼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모습에 대한 항의가 담겨있는데, 이는 자신들의 무지함을 깨닫자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후
전태일은 1948년에 태어난 가난한 노동자이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 했고, 평생을 주린 창자가 차도록 밥 한 끼 포식해 본 일이 드물었으며, 죽을 때까지도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았지만, 비록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름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