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우리 붕당정치의 역사이다. 선조 대부터 시작된 붕당정치는 영, 정조 대에 들어서는 그 분파가 다양하게 세분화된다. 사림 정치의 역사는 정조 시대 정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노론, 소론, 남인을 골고루 등용 (북인은 광해군때 소멸)
- 삼색도화라 비꼬기도 했음
. 구원제도 : 뒤 책임을 묻지 않고 건의를 받는 제도
. 송인명의 제안 : 탕평책 - 공자의 탕탕평평
. 정조 : 영조정책을 그대로 계승
. 붕당대립의 마무리
13. 탕평책의 실시
. 시파, 벽파
. 1800년 세도정치로 변환
정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당쟁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정치책이 꼭 나쁘다고 볼 수 만은 없다.언제나 경쟁가운데 발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붕당정치는 서로 간의 견제 속에서 발전한 정치형태라고 볼 수 있으며 지금은 사림 정치라는 개념
아이분만, 정조 , 애국심, 노예를 다스리는 것 등등이다. 교육이 국가 존립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게 취급하며 개인의 사색이나 정신교육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도덕적 정치적 측면에는 기여한 바를 찾을 수 없고, 인간의 창의력과 자율성 신장에 도움이 되지 못한 점이 많은 비판점을 안고 있다.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3) 강진 유배지에서(1801-1818)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