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183명, 평론에 59명이 등장한다. 친일적인 색채가 거의 없는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국문학 고전을 수록하여 민족 문학 유산을 옹호 전파하였고, 서구 문화 도입에도 뜻을 두었다. 작품은 소설 162편, 시 180편, 시조 34편, 수필 183편, 희곡 6편, 시나리오 2편, 평론 119편 등이다.
정지용은 우리 현대
수필, 기행문이 수록된 《문학독본》을 출판한다. 이태준이 북으로 넘어가자 그는 "소설가 이태준 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 오라"는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는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2) 정지용의 시 세계
정지
수필에 183명, 평론에 59명이 등장한다. 친일적인 색채가 거의 없는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다.
정지용은 우리 현대 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각별하게 드러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의 대다수 시인이 감정의 분출에 의거하여 본능적인 시를 썼다면 1920년대 초반에 작품 발표를 시작하여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어서 일제하의 한국문학계를 이끌었다.
춘원에 이어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고, ‘조선문학가 동맹’의 준비위원,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 의장단 등을 역임했으며, 1946년에 월북을 하였다.
‘구인회’ 활동의 과거와 사상성을 이유로 임화, 김
정지용은 한국 시사에 근대와 현대의 분기점에 위치하여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하지만 정지용은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는 월북 작가로 취급당하여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가 미미하였다. 한 때 김용직, 김윤식, 오탁번, 양왕용 등에 의해 정지용 시에 대한 부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