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추전국시대의 성립
동주시대의 주왕실은 갈수록 쇠약해져, 하남 서부지역만을 통치
주왕 또한 표면적으로만 ‘천자’의 지위를 유지했을 뿐, 실제적으로는 제후들을 통솔할 수 없는 상태
각 제후국은 패자(覇者, 제후중의 우두머리)가 되기위해 주천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패
시대)에 와서는 새로운 사회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송영배, 「고대중국 상앙학파의 법치주의」, 철학문화연구소, 1988, p.132~133
미개한 원시적 단계에서 인간 개체들 간의 이기적 투쟁의 문제가 중세의 문명적 현인제도 하에서 공공의 도덕원칙을 통하여 해결을 보았다면, 이제 중세
시대와 연대가 비슷하여 새로 재편된 이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불리고 있다.
2) 춘추시대란?
주(周)나라 13대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37대 난왕(赧王)이 진(秦)나라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의 514년간을 동주(東周)시대라 하고, 동주시대를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눈
시대의 주요무기는 칼, 창 활, 방패 등 동제(銅製) 무기로 밀집대형에 의한 전투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고, 전장(戰場)의 범위도 재한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양자강 이남의 오(吳) 와 월(越)은 인접 국가로써 주도권 다툼이 치열해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사성어가 생겨나기도
제 15 맹상군 열전
제나라 위왕때 맹상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맹상군은 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4공자중의 한 사람으로 조나라의 펴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과 더불어 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맹상군은 재상 전영의 많은 아들 중 하나였다.
그가 태어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