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는 1482년 8월 10일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조씨 가문은 대대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바 막강한 무장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북면이 토호적 기반이라는 점 때문에 중앙정부로 진출하여 유력한 가문이 되기는 힘들었다. 계유정난을 계기로 한양 조씨가는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도태되
조광조의 정치개혁과 기묘사화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는 성종 13년(1482)에 태어나 청년기의 대부분을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부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이어지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서 보냈다. 하지만 1498년의 무오사화로 인해 희천으로 유배되었던 영남사림파의 거두 김굉필을
조광조(靜菴 趙光祖)는 성종 13년(1482)에 태어나 청년기의 대부분을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부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이어지는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서 보냈다. 하지만 1498년의 무오사화로 인해 희천으로 유배되었던 영남사림파의 거두 김굉필을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은 개혁성향을 지닌
정치가 분화되지 않아 지성인으로서만 살아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고식적인 과거제를 혁신하여 왕조에 새로운 기풍을 심으려 했던 노력이나 당시 기득권자인 정치실권을 개혁하려 했던 일은 그를 높이 평가한 후대에서도 전혀 시도되지 않았다. 조광조의 개혁은 조선왕조 지배층의 내부에서 자체적
Ⅰ. 서론
조광조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의 개혁성은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 시기의 나라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개혁사상은 치국의 도 중에서 왕의 도리를 가장 주요시 여기는 왕도정치였다. 정암은 왕과의 경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