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농업문제는 그 심각성이 날로 더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다산은 선배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음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한층 더 철저한 관점에서 출발하고자 했다. 그의 경제사상은 농(農)을 천하의 근본으로 보는데 있으며 국부의 근본 또한 농업에 있
중 한 사람이었고 그가 저술한 논문 <조선불교유신론> 또한 불교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 본연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촉구했던 개혁론의 하나이다. 그것은 불교인의 인식의 변화에서부터 비롯하여 제도나 조직은 물론 의례와 포교의 방법론에까지 의지적이고 실천적인 개혁 방안들을 다루고 있다.
조선왕조의 국왕 중 어리고 무능한 왕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정국의 소산이다. 정복왕조가 많이 들어서서 황제권이 강한 중국과는 달리 신료들의 권한이 강한 조선에서는 붕당이 공인되다시피 하였다. 중국은 땅이 넓고 민족이 다양하다 보니 황제권에 직접 도전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신료들간의 세력
개혁론을 두고 그것에 대한 실학자들 사이의 이론을 비교 분석하여 개혁론의 전개과정 전체를 조망함으로써 실학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방법이 더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학자의 이론을 비교하는 방법론을 택할 경우 성리학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기존의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