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한국불교를 일제의 침략 이용물로 만들었으며 점차 한국불교계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몇몇 선구자들이 등장하였다.
만해 한용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가 저술한 논문 <조선불교유신론> 또한 불교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 본연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촉구했던 개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적 공적은 그가 [조선불교유신론](1910), [불교대전](1913) 등을 통해 이 땅의 침체됐던 불교를 개혁하여 근대화하고자 노력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불교개혁운동 또는 불교근대화 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불교운동은 그것이 민중 불교, 생활 불교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만해연구관, 만해수련원, 만해도서관 등도 있다.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기초선원으로 지정되어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다.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활동하며 일제강점 당시 우리민족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준 만해 한용운의 문학성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여 대중 깊숙이 뿌리박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바로 <조선불교유신론>의 저술은 그런 그의 사상과 행동적 지침을 완성한 것이며, 친일매판불교에 대항한 불교의 자주화운동, 즉 임제종 종지수호운동은 이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만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각
체험하였다. 일본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우하였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