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에 대하여 알고자 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고문을 당하고 빨갱이 취급을 받아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서 무기수로서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이제는 이처럼 자유롭게 모택동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의 생애를 돌
●논란
1. 김일성 진위 논쟁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북조선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
이후로 모택동은 자신들이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사상을 확립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의 주요 업적
1917년 신민학회 조직
1924년 창사 제1사범학교 부속소학교 교장
1924년 공산당 중앙위원
1930년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
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 해 10월 마오쩌
모택동의 생애등을 돌아보고자 한다.
우선 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시각은 서구주의와 반공주의에 의해 우리는 중국, 즉 공산권 국가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서구 중심적 편견)인 시각과 본능적인 부정적인 시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것을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