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은 1929년 신사참배 반대 헌의안을 당시 노회장인 함태영(咸台榮) 목사에게 제출하였다고 한다. 경남노회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결정을 했을 때 일본인이 경영하던 부산일보는 이 사실을 보도하였고, “완미(頑迷)한 양귀(洋鬼), 끝끝내 신사참배거부”라는 제하의 사설을 게제하기도 했다. 주
결심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1925년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31년까지 부산 초량 교회 위임 목사로 시무하던 중에 일제의 신사참배 문제를 단호하게 거절해야 된다는 안을 노회에 제출하여 투쟁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신사참배이다. 그 끼친 영향력만 놓고 볼때도 그 중요성을 논하기에 충분하기에 신사참배로 인한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야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먼저, 신사참배는 무엇이었냐를 알아봐야 할것이며,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쳤던 주기철목사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의를 그려보고자 한다.
운동 주도하였다는 죄목으로 1년 간 옥고를 치른다. 1925년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평생 동안 쉬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반대로 감옥에 갈 때 “눅 9:62, 마10:37∼39를 마음에 깊이”새기라고 했다한다. http://www.aeyangwon.org/pastor/martyr.htm (손양원목사의 순교사상).
교회당을 짓
2. 주기철 목사와 배형규 목사의 활동
1)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주기철 목사의 활동
(1)신사불참배운동과 주기철 목사
본격적인 항거운동은 1938년 초 전국노회에 신사참배가 강요된 때부터 일어났다. 2월9일 교세가 가장 강하고 한국 교회의 지도인물들이 다수 있는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