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러시아간의 관계는 13세기 원나라 시대부터이다. 러시아인과 처음 접촉한 민족은 중국 한족이 아니라 몽고인 이었고 당시 수도이던 북경에 러시아인이 많이 살기도 했다. 17세기 중반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를 한 국가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바. 국경 또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655년 처음 외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를 얘기할 때 라마교를 얘기하지 않는다면? 순교의 의미를 무시한 채 회족의 역사를 서술한다면? 몽골의 역사에서 티베트 불교와의 만남으로 많은 변화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위구르족의 분열과 저항에서 이슬람교의 정신을 무시한다면?
원나라 때 잠시 과거제도를 부활 시켰던 것의 두 번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다. 유학이 유학만을 존숭하는 이른바 독존유술(獨尊儒術)의 결실을 획득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다. [사기]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시황제 시절에 순우월이라는 학자가 봉건제 시행이 국
60년대에 서구에서는 그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엄청난 결과물을 쏟아냈다. 이른바 선진국은 근대화의 발전 모델이 되었고 후진국은 그것을 추종하기에 바빴다. 서구의 이론가들도 그러한 모델에 심취하였고, 여러 가지 이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근대화”와 “서구화”는 서로 호환되는
사건으로 명종대 이후 1백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의 시초가 된다.
흔히 무신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정중부(鄭仲夫)로 이해되어 왔다.《高麗史》에 무신란이 정중부의 난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무리가 아니다. 정중부는 의종의 신임을 얻어 궁궐의 복문을 통해 왕궁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