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형성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점령 하에서 진행되었다.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 점령군은 봉건적 친제국주의 세력의 제거가 아니라 현상유지, 즉 식민지적 지배질서의 재편성을 통해서 반공의 전진기지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권력, 제도 등 모든 국가기구의 수립 자체는 거의 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등소평의 급성장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30만읜 군중 앞에서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중공은 북 경을 수도로 삼고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국기로 하며, 항일전 때에 널리 불렸던 '의용군행진곡'을 국가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Ⅰ. 들어가며
중국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학습하기 위한 문화탐방 프로그램을 기획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북경을 뽑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의 수도이며 중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근대사를 들여다보면 한국과 비슷한 모습에 많이 놀란다. 물론 서구 제국주의가 들어오는
중국을 선택하게 되었다. 때마침 중국정부의 타이어생산 육성정책(팔오계획, 1991~1995)에 힘입어 중국 내 여러 지역을 검토하던 중 상업의 발달과 성장 가능성이 크고 교통의 요지인 남경과 천진을 진출 후보지로 결정하며 중국 진출의 첫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여러 국가에 공장을 증설하고 있고
국가와 정체성 사이에서 의문을 품게 되고 각종 분리독립 운동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경제격차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내부 식민지화의 경로이다. 한족은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産建設兵團) 신장생산건설병단은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부터 멀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