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졌다. 드러난 상태인 已發處의 四端과 七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던 학자들은 점차 드러나지 않은 상태인 未發處의 心과 性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곧 人性과 物性의 규정문제로 확대되었다.
18세기 초엽
중의 의식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게 되어 참된 의미에서의 근대성을 획득하려는 방향에서 민족․민주 운동의 주된 내용을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6․3사태’로 통칭되는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인 동시에 5․16 군사정권의 반민족성을 폭로하였으며 1969
I. 들어가는 말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심화되었던 조선 중기에 비해 조선 후기는 그것이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경향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예학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고, 본격적인 시작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서인은 의리 명분론을 강화
논쟁에 대한 부분에서 최소자는 강희제의 천주교에 대한 무식이 전례문제의 개입과 복잡화를 가져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책들에서는 강희제의 무식 보다는 천주교 내부의 문제, 즉 수도회 간의 대립 등을 전례 논쟁의 배경, 원인으로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