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심화되었던 조선 중기에 비해 조선후기는 그것이 교조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경향은 예송논쟁으로 대표되는 예학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고, 본격적인 시작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서인은 의리 명분론을 강화
성리학의 형식적 명분론과 같은 것보다는 알찬 내실의 학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 小論은 유학, 특히 한국유학의 몇 가지 일반적인 문제점에 촛점을 맞추면서 그에 앞서 유학의 배경과 사상적 특징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따라서 본 소론은 한국유학의 심오하고 방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
조선 전기 :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가 사상적 배경이 근간을 이루며 충의와 자연 친화 의식이 두드러짐.
④ 조선후기 : 실학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풍자와 해학, 비판 정신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남.
⑤ 개화기 이후 :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주지적이고 사실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
경향은 당시 사회 문화적인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언어학은 언어가 가진 사회적 속성으로 인해 더욱 그러하다.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 창제의 언어학적 배경이 되었던 성운학과 철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던 성리학이 주요 연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실학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사유 체계
경향이 강했다. 반면에 여성에게 저고리는 겉옷 역할을 해서 다양한 종류의 저고리가 여러 가지 소재로 만들어졌다. 전기 여성 저고리는 후기와 달리 품이 넓었으며 남성 저고리와 비슷한 길이였다. 저고리의 등장은 조선 초기 상경농법(常耕農法)의 시작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상경농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