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론의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종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구체적인 운동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제1기는 1866년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을 정립한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이 활
사상의 연원은 이용후생을 주장하던 북학사상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 및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서 이항로의 철학 사상 중에서 그의 이기론의 특징과 그가 이기를 어떤 식으로 인식했는지 알아보고, 심성정의 관계와 심통성정, 그리고 인심 도심의 문제와 인물성동이(同異)문제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理氣의 不雜과 主理的 인식방법
대한 이윤을 얻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은 특히 값싼 한국산 농산물의 수입을 통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그런 만큼 농촌경제에 미치는 피해가 컸다. 농업생산력의 성장 속도를 훨씬 웃도는 식량의 급속한 대일 수출은 조선에서 식량위기와 쌀값의 상승을 가져왔다. 1889년에는 삼남지방의 대가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도학은 조선시대를 일관하게 지배해 왔던 이념적 기반이었으므로, 19세기 후반 조선왕조 말기의 급박한 역사적 상황에 당면하자, 화서 이항로를 선두로 하여 전국적으로 산림(山林)의 도학자들이 일어나 새로운 각성으로 침체하였던 도학정신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