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의 역사는 인간이 하늘을 바라보며 시작되었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철학과 함께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지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던 시절을 지나 인간은 좀더 자세하게 해와 달과 별들의 변화를 관찰하게 되었다. 인간은 이미 고대 이집트시절 1년이 365
천문학은 당시의 중국이나 아랍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천문역산학 말고도 당시의 과학기술의 두드러진 업적으로는 활자 인쇄, 화기, 농업, 의약 분야의 기술이 크게 발달했고, 도량형과 음악의 과학적 정리가 크게 진전됐다.
그런데 세종시대 때 그렇게 발달했던 과학기술이 그후에는 왜 별로 명성
천문학 -
[동궐도] 1830년대 그려진 천문대의 옛 그림.
그림 한가운데 보이는 관측대가 창경궁 관천대이다.
세종대왕의 천문역산학에서의 업적을 살펴보려면 우선 어떤 천문 기구들이 만들어 졌는지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1) 간의
- 천문 관측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장치로 세종대왕이 만들어 세운 것
천문 현상을 재난으로 인식하는 동양적 우주관도 받아들여 628년부터 일식과 월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반도가 통일되자 백제와 고구려의 학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의 천문학, 역산학(曆算學)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때쯤 나라 시대로 접어든 일본에는 천문, 역산, 복점을 담당하는 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서의 발간은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여겨졌다.
의 담당기구인 음양의 근무한 천문학자, 역산학자들도 7세기까지는 거의 다 한국에서 건너간 학자들이었고, 8세기부터 일본에서 교육받은 세대로 대체되었다고 일본 천문학사는 밝히고 있다.
2. 첨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