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는 정치적으로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데 간첩죄와 반종파투쟁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한국전쟁당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상당히 강조되었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분단체제와 미국과의 군사적 긴장감을 이용하여 북한지도부는 정치적반대파의숙청과 강력한 지도력을
김일성의 경제재건 노선의 바탕에는 북한의 주체적인 경제 발전 노선의 성립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당시 북한 내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세력들을 숙청해 나가는 작업이 이루어 졌다. 숙청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더욱 강화하고 일인체제로 나가는 기반을 마련했다. 여기에
Ⅰ. 서론
김일성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군중대회 연설을 시작으로 권력행보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에 결성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의 위원장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1945.10.13. 설치) 책임비서가 되었다. 한 달 후인 3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북조
김일성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친인척을 고위핵심요직에 등용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므로 김일성은 이러한 친인척을 내각중심의 관직에 등용하여 곁에 두었다. 그리고 김정일은 후계자초기에 친인척배제의 인사원칙을 내세운 적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후계체제의 안전을 이유로
김일성파에게 역공을 당하면서 숙청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북한 역사에서 ‘8월 종파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김일성에게는 정치적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내에서 김일성의 정치적 반대파를 거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안정식 기자, ’북한 포커스’]
- 집단체제의 성립과 경제성장